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하디-바인베르크 법칙 (문단 편집) == 역사 == [[1908년]], [[케임브리지 대학교]]의 유전학 교수였던 레지널드 퍼넷(Reginald Punnett)[* Punnett Square의 그 퍼넷이다.]은 [[멘델 유전 법칙]]에 대한 강의를 하던 중, 당시 저명한 통계학자였던 율(G. U. Yule)[* 일명 Undy Yule. 이후 [[http://exactitude.tistory.com/675|Yule Process]]와 Yule Distribution으로 학계에서 이름이 남게 된다.]로부터 이런 질문을 받았다. > 단지증(短指症)은 우성형질이라고 알려져 있습니다. 열성과 우성 유전자를 다 가진 개체는 우성형질이 발현된다고 하면, 부모 세대보다 자식 세대에서 단지증이 늘어나야 하므로, 동일한 수의 단지증 환자와 일반인(1:1)끼리 무작위로 교배했을 때 다음 세대는 단지증 : 일반인의 비율이 3:1이 되어야 합니다.[* G. U. Yule, Proceedings of the Royal Society of Medicine, Epidemological Section, 1908, Vol. 1, p.165. ] 그렇게 다음 세대로 갈 때마다 단지증 환자가 늘어나면, 나중에는 모든 사람의 손발가락이 다 짧아져야 하는 것 아닙니까? 퍼넷은 경험상 이 말이 틀렸다는 걸 알았지만, 왜 그런지는 그 자리에서 설명하지 못했다. 얼마 뒤 퍼넷은 친구인 수학자 [[G. H. 하디]]와 저녁 식사를 함께 하게 되었다. 그때 이 이야기를 꺼내 봤는데 갑자기 하디가 냅킨 위에 [[곱셈 공식|다음과 같은 수식 몇 개]]를 적어주었다. >[math((A+a)^2 = A^2+2Aa+a^2)] 그러고 나선 [[참 쉽죠?|"그건 이렇게 풀면 되잖냐. 중학생도 풀겠다."]]라고 하는 게 아닌가? 깜짝 놀란 퍼넷은 하디에게 당장 이것을 논문으로 발표하라고 했지만, 순수 수학자였던 하디는 자기 전공분야도 아닌 생물학의 너무 쉬운 문제 하나 푼 것 가지고 논문을 쓴다는 것에 거부감을 보였다. 수학으로서 위대한 발견을 하겠다고 거절했다. 실제로 [[G. H. 하디]]는 정수론을 비롯한 순수 수학만 한 수학자로, 지금까지 순수한 수학만 한 게 자랑이라 여긴 사람이었다. 자신의 동문이자 공동연구자였던 리틀우드와 함께 Hardy-Littlewood circle method, first and second Hardy–Littlewood conjectures 등을 발표해 당대 영국 최고의 수학자로 이름을 날렸다. 남들이 다 무시했던 라마누잔 노트의 가치를 알아보고 [[스리니바사 라마누잔]]을 영국으로 초빙했던 것도 바로 이 사람. {{{#!folding [ 논문 원본 보기 ] [[파일:하디님 살려주세요..jpg]]}}} 그러나 결국 친구 등쌀에 못 이긴 하디는 [[http://www.esp.org/foundations/genetics/classical/hardy.pdf|'''A4 한장짜리 논문''']][* Hardy, G. H., 1908, ''Mendelian Proportions in a Mixed Population'', Science, N.S. Vol. 28, Jul. 1908, p. 49-50.]을 작성하여 [[사이언스|학술지]]에 실었다. 엄청난 압축과 요약 설명을 보여주고 있는데, 수학 분야의 논문에서 곧잘 보이는 특징 중 하나다. 하디 논문의 다른 특징이라면, 수식이 작성된 부분 빼고는 서술하는 뉘앙스가 대놓고 [[귀차니즘]]을 드러내며, 핀트를 잘못 짚은 율에 대한 적나라한 디스로 도배되어 있다. 그런데 이 'A4 한 장짜리 너무 쉬운 문제'를 정리한 논문은 훗날 '''유전학의 [[F=ma]]라고 불리게 되었다.''' 한편, [[독일]]의 의사 빌헬름 바인베르크는 하디의 논문 발표보다 6개월 전인 1908년 1월 13일 독일의 학회에서 '''몇 년간의 자료 조사와 연구에 근거해''' 독자적으로 동일한 법칙을 발표했었지만, 그 사실은 1943년 독일인 과학자 쿠르트 슈테른(Curt Stern)[* 유대계 독일인으로 이때는 미국에 망명해 있었다.]이 미국의 학술지 사이언스에 기고한 기고문에서 지적할 때까지 35년 동안 묻혔었다. 바인베르크가 당시 유전학계의 주된 언어인 영어가 아니라 독일어로 논문을 냈기 때문에 묻혔다는 게 중론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